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한국교회 설교의 심각한 문제점: 더 이상 기복신앙이 문제가 아니다.

신앙 꿀팁

by 굴러가는오렌지 2024. 10. 29. 14:45

본문

요즘 주변에서 유명한 목사님들 설교를 들어보라는 요청이 많아서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명하신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다 보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않아서 듣는 이에게 너무나 큰 괴로움을 주고 있습니다. 제가 들어본 10개 교회 중에 7-8개 교회의 설교에 이 문제가 있다고 보였습니다. 하지만 몇십 년 전의 설교의 문제점과 오늘날 설교의 문제점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것을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이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통해 몇 자 적어보고자 합니다.
 


 
오래전부터 한국교회의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라고 한다면, 기복신앙이 단연코 주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성도님들도 기복신앙이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에 많이들 동감하시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아래와 같은 설교를 하는 교회도 많이 사라지는 추세입니다. 다시 말해, 이제 한국교회의 설교 문제가 더 이상 기복신앙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 기복신앙의 예
1. 예수 믿으면 사업이 잘 된다.
2. 예수 믿으면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간다.
3. 예수 믿으면 건강해진다.
4. 예수 믿으면 늘 행복해진다.
5. 예수 믿으면 내세에 공덕을 쌓게 된다.
.
.
.
 

그렇다면 이제 새롭게 발생한 설교의 내용상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의 사사화(privatization)라는 문제입니다. 사사화라는 것을 쉽게 말하자면, 어떤 성경 본문이 거시적 차원의 말씀을 다룰 때, 설교자들이 그것을 지나치게 축소화, 편협화, 소극화시켜서 매우 개인적인 신앙에만 적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해석하지 못하는 과정에서 생기거나 혹은 성도들에게 무작정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다 보니 생기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 6장에는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성경구절을 사사화하여 해석하는 목사님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다 보면 여리고성처럼 단단하고 높은 장벽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짐을 모두 내어 맡기면 난공불락의 여리고성도 결국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장애물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이 성경 해석의 문제점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자 했던 하나님의 거시적 차원의 의도는 무시하고 철저히 개인적인 신앙에만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내용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다는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리고 듣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뜻을 오로지 내면화, 개인화하여 거시적인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여리고성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달하실 때 순전히 인생의 장애물을 하나님께서 극복하게 하신다는 내용만을 담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 여리고성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성을 무너뜨릴 때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었다고 말합니다(수 6: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부는 이유는 희년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김지찬, 한국교회 설교의 근본적 문제점, 2013). 희년은 노예가 해방되고 억압과 폭력의 시대가 종식되며, 하나님의 형상들이 옛 에덴동산 때와 같이 온전한 자유를 다시 누릴 수 있다는 선언이자 선포의 해입니다. 하나님은 왜 여리고성을 향해 희년을 선포하라고 하신 걸까요? 주전 15-13세기의 가나안 지역의 상황을 묘사하는 아마르나 서신들(Amarna letters)을 살펴보면, 그 당시 왕들과 귀족들이 농민계층의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김지찬, 한국교회 설교의 근본적 문제점, 2013). 그런 맥락에서 여리고 에피소드는 하나님께서 억압과 착취를 일삼던 가나안의 왕들과 귀족들을 심판하시고 이 땅에 박해받는 자들을 위하여 평화와 정의를 세우고자 했던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여리고 에피소드가 단순히 한 개인의 인생의 어려움을 하나님이 해결하시겠다는 그런 협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억압과 차별, 그리고 폭력이 가득한 세상을 뒤엎으시고 평화와 사랑 그리고 이해와 용납이 있는 세대를 열어가시겠다는 더 넓은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성경 이야기는 상당히 거대한 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 또한 상당히 거시적인 개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인종, 계급, 재정, 지식, 성별 등을 뛰어넘어 사랑이라는 이념 아래 모든 차별의 장벽을 허무는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매우 거시적이며, 더 넓은 차원의 메시지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설교는 거의 대부분 한 명의 개인, 즉 내면의 신앙생활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교회가 해야 할 거시적 차원의 맥락 즉, 이 시대의 정의, 이 시대의 사명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저 개인의 경건 생활(기도, 묵상, 예배생활)을 강조하는 사사화된 설교만 난무합니다. 때로는 그런 설교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매주 그런 설교만 강조하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이웃사랑,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하게 만듭니다. 기독교를 그저 내면의 정신 수양을 하는 종교로 만들 뿐입니다.
 
그런 설교만 하는 목사들도 문제이지만, 그런 설교만 좋아하는 성도의 문제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거시적 차원의 사랑, 사회정의는 외면하고, '나'라는 한 개인이 말씀을 통해 위로와 평안만 받았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도의 안일한 태도입니다. 사회에 억압받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 내밀지는 않으면서 개인의 경건 생활만을 갈고닦는 것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예수님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들을 보살폈던 그분의 모습과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의 설교가 지나치게 사사화된 내용을 버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만들고자 했던 더 넓은 차원의 비전을 고려해야 할 때입니다.

'신앙 꿀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_ 선택이 아닌 방향.  (2) 2023.07.10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