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다시 보는 주기도문, <주기도문과 채무 경제의 전복> 리뷰

도서 리뷰/신약 리뷰

by 굴러가는오렌지 2022. 2. 7. 18:19

본문

 

1.  들어가는 말

 

주기도문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유일한 기도문이기도 하다. 이 기도문을 제대로 알지 못한채로 기독교 신앙을 가지기는 어렵다. 그래서 매 예배 때 주기도문을 외우거나 이 기도문을 따로 공부하기도 한다. 또한 각종 소그룹 모임에서 모임을 시작하거나 끝낼 때 주기도문을 외우기도 한다. 그만큼 이 기도문은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기도문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이해하고 있을까? 

 

많은 경우에 있어서 주기도문은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내용이라고 해석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이 대체로 주된 해석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주기도문은 세속적인 문제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훨씬 더 원대한 문제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도날드 해그너, 마태복음33 WBC주석, 296). 그러니까 예수는 제자들에게 세속적인 문제가 아닌 종교적 영역에 국한된 기도문을 가르쳤다는 말이다. 만약 예수가 알려준 기도문이 영혼의 구원에만 그 초점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 세속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이들에게 그 기도문은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영혼의 평화'는 고통받는 현실을 초극하여 신의 은총과 선물이라는 심리적 보상으로 대체하는 전략인 셈입니다
(김성민, 바울과 현대철학, 56).

 

니체에 따르면, 영혼의 평화를 위한 기독교 신앙은 고통받는 현실을 외면하고 심리적 위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니체의 시선에서 기독교는 이 세계의 고통을 외면하는 종교로 정의된다. 그래서 주기도문이 단순히 영혼의 구원을 위한 기도문이기만 한다면 니체의 비난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니체의 주장처럼, 현실 세계를 도피하려는 종교에 불과한 것일까? 예수가 가르친 주기도문이 과연 영혼의 구원만을 위한 기도문일까?

 

 

2.  주기도, 1세기 사회를 전복하다

 

<주기도문과 채무 경제의 전복>을 쓴 더글라스 E. 오크만은 주기도문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제기하였다. 이 기도문은 예수가 활동했던 당시 상황과 아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오크만이 주목한 1세기 상황은 바로 부채 문제였다.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 부채 문제로 상당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는 오크만의 주장이다.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과중한 세금으로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크만에 따르면, 이렇게 강제로 징용되는 세금은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상당한 반감을 가져왔다고 말한다(오크만, 178). 그 결과 기원전 4년, 기원후 6년, 기원후 66년에 반란이 일어났으며 빈번하게 강도떼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의 원인이 바로 채무 경제에 대한 반감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세속적인 문제'에 예민한 상태였다.

 

이러한 팔레스타인 상황 속에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기도문을 알려준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친밀하게 알고 있는 주기도문이다. 오크만에 따르면, 주기도문은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직면할 수 있는 모든 세속적인 관심사에 대한 내용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오크만, 166). 그는 이 기도문 안에 채무 경제를 전복시키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고 말한다. 주기도문의 첫 번째 청원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라는 것이다. 오크만에 따르면, 이 첫 번째 청원은 결핍과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음식을 구하려고 하나님을 축복하는 기도라고 말한다(오크만, 136).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라는 간청은 하나님을 축복하는 행위로 하나님의 도움을 더 간절히 간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첫 번째 청원은 하나님의 자비로움에 호소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로움에 호소하여 지금의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청원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무거운 과세를 부과하는 현재의 나라와 대비되는 신성한 나라이다. 오크만에 따르면,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는 빚이 탕감되고 세금이 면제가 되는 나라라고 한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간구는 현재의 통치자들의 조세 방식을 부정하는 체제 전복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20세기 러시아 한복판에서 미국의 통치 방식이 옳다고 선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또는 일제강점기 치하의 한반도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일과 같은 것이다. 오크만에 따르면, 예수가 주장한 하나님 나라 때문에 사회 엘리트들이 예수를 주목해 보았고 그를 조세 저항자들에게 부과하는 형벌인 십자가형을 내렸다는 것이다(오크만, 173). 

 

오크만은 주기도의 나머지 부분 역시 모두 채무 경제를 전복하는 내용들로 채워져있다고 주장하였다.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청과 빚(죄)이 사해질 수 있도록 간청한다. 그리고 채무 불이행으로 인해 악한 재판관이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들을 감옥에 투옥시키지 않도록 간구하는 기도를 올리는 내용이 담겨져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채무를 가진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하면 그 사람은 감옥에 투옥된다. 그의 가족들은 그를 감옥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그가 가진 빚(죄)을 다 갚아야만 했다. 다시 말해, 주기도문은 1세기의 채무 경제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도문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기존 사회 질서와 대립되는 내용이며 채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간구하는 내용들이다.

 

 

3.  주기도, 21세기 사회를 전복하다

 

현대 사회도 채무로 구성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간단한 빚부터 시작하여 생존에 필요한 모든 부분에 이르기까지 채무가 부과된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신용카드로 구입했다면 다음달에 원금과 더불어 이자까지 함께 납부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다소 간단한 채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며 생존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집이라면 어떨까. 집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다. 그것이 대도시나 재개발이 되는 지역이라고 한다면 더욱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집을 구하기 위해 대출(채무)을 받는다. 그리고 그 대출금은 원금과 더불어 이자까지 납부해야만 한다. 벌어들이는 수입에 상당 부분을 채무를 갚는데 사용된다. 집을 구매할 돈이 없는 사람은 전세를 구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기존에 가진 자금으로는 어림도 없다. 매매보다는 적지만 전세집도 대출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자를 매달 갚아야 한다. 더불어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자동차라도 구입하게 되면 어떨까. 이보다 더 많은 지출을 빚을 갚는데 사용해야만 한다. 채무가 완전히 없는 현대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렇듯 현대 사회는 1세기 팔레스타인 사회 못지 않게 채무 관계로 뒤덮인 사회이다. 하지만 필자는 현대인들이 이러한 채무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집을 구하는데 어째서 빚(죄)를 져야만 하는가. 기초적인 생활을 하는데 어째서 할부금을 내야만 하는가. 채무 생활은 예수의 시선에서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활을 당연시하면 안 된다. 예수는 모든 채무로부터 해방되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였다. 현대인들의 생활 방식은 하나님 나라에 의해 전복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 나라를 간구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폭력을 표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기도문을 외움으로써 지금 이 세상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 즉 아무런 채무 관계도 가지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교회가 채무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채무 관계는 하나님 나라에서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과도한 채무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교회가 희망이 되어줘야 한다. 그들의 채무를 없애기 위해 다양하고 합리적이며 성경적인 방법들이 고안되어야 한다. 교회는 영적인 구원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교회는 지극히 세속적인 관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장소이다.

 

4.  나가는 글

 

주기도문은 세속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단지 영혼의 구원을 위한 기도문이 아니다. 주기도문은 채무 관계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내용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도문이다. 그 기도문은 1세기 사회에서는 아주 파급적인 내용이었으며 동시에 21세기 사회에도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채무 관계를 유도하는 이 세상은 정상적인 세상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채무도 갖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가 꿈꾸던 세상이며 지금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기도 하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