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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바클레이 <바울과 선물> 리뷰

도서 리뷰/신약 리뷰

by 굴러가는오렌지 2020. 5. 15.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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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바클레이의 <바울과 선물>

선물은 답례를 수반한다.

존 바클레이의 <바울과 선물>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카리스(선물 혹은 은혜)'라는 단어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고대 로마인들은 선물을 주고받을 때 사회적인 유대를 형성하기 위하여 '선물과 답례'라는 순환적 작용을 하였다. 쉽게 말해, 고대 세계에서 선물이란 수혜자가 아무런 대가 없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여자는 자신의 자선을 설령 잊어버렸어도 수혜자는 반드시 그것을 기억하여 어떤 형태로든 수여자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결혼식장의 풍경을 생각해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하객은 신랑과 신부를 축하하기 위해 축의금을 전달해준다. 축의금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신랑과 신부는 반드시 이를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추후에 이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답해야 한다. 이처럼 현대 사회도 선물과 답례라는 순환적인 패턴을 통해서 사회적 유대감을 강화시키는 예를 확인할 수 있다.

 

선물과 답례의 개념은 로마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적용되었을까? 유대 전통 내에서는 종교적 경건이 필수적인데, 이는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자비의 행동은 하나님에게 충성을 받치는 것이며, 헌신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수여자는 종교적 경건을 위해 하는 것이므로 수혜자에게 답례를 기대하지 않은 대신, 하나님에게 그것을 기대하였다(89p). 존 바클레이에 따르면, 유대인들도 로마인들과 마찬가지로 선물의 행위에는 답례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유대인은 그것을 사람에게서 찾지 않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올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바클레이는 이 근거를 토빗서와 같은 후기 유대 문헌, 그리고 신명기에서 찾았다. 

 

현대인들에게 보통 '선물'이란 어떠한 답례를 기대하지 않고 순수하게 주는 것으로 여긴다. 이것으로 비추어 볼 때, 고대인들의 선물 개념과는 크게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가 바클레이에 따르면, 현대인들이 칸트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기 자신의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의무는 답례에 대한 기대 없이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다(111p)." 바클레이는 이러한 선물 개념이 서구에서 발생한 '발명품'이라 규정한다(113p). 즉, 서구에서 이해하는 선물의 개념을 고대인들이 사용하는 선물의 개념으로 역투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선물이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무조건적이란 수혜자가 선물에 대한 답례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이다. 이 선물을 받은 사람은 죄의 종노릇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반드시 요구받는다(945p). 신자들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며, 경쟁 정신을 거부하고 성령의 가치관과 다른 것들을 단절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선물이 은혜의 비순환성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와 같이, 바클레이는 신학은 사회적 실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고 언급한다(735p). 제2성전기 유대 문헌을 통한 그의 분석은 값싼 은혜를 정면으로 배척하며 성도들의 필수적인 순종을 요구한다.

 

은혜는 무제약적이다.

바클레이는 은혜를 6가지로 정리하였다(131-140p).

 

  1. 초충만성 : 선물은 더 충만하고 포괄적일수록 더 완벽하게 보일 수 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선물의 크기이다.
  2. 단일성 :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오로지 선한 것의 원인이 되신다.
  3. 우선성 : 선물은 수혜자의 요구보다 언제나 앞서서 발생한다. 먼저 건네지는 선물은 자발적 관대함을 표현한다.
  4. 비상응성 : 선물을 받는 사람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5. 유효성 : 하나님의 선물은 은혜를 받은 사람의 행위의 기초가 된다. 즉, 선물은 수혜자의 행동 원인이 된다.
  6. 비순환성 : 선물이 답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물은 수혜자에게 굴욕감을 준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 내에서 은혜를 주장했던 유일한 인물이 아니다. 제2성전기 유대 문헌을 보면 이미 은혜에 대한 '다양한' 글들이 존재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6가지의 은혜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였다. 바클레이는 은혜의 여섯 가지 중 한 가지 개념만을 강조하여 극대화시킬 수도 있고, 다른 개념과 연결할 수도 있으며 서로 분리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에스라4서는 은혜의 비상응성을 강조한다. 반면에,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은혜의 초충만성과 단일성 그리고 우선성을 강조한다. 교부 시대까지 확장해서 본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의 비상응성, 우선성, 유효성을 사용하여 긴밀한 통합을 이루었다. 그리고 펠라기우스가 주장하는 은혜는 우선성과 초충만성이 강조된다. 이처럼 은혜는 다양한 조합들을 통해 극대화할 수 있다. 사도 바울 역시 은혜의 개념 중 일부를 극대화시켰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비상응성을 강조하였다. 바울이 말하는 비상응성은 수혜자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고 주어지는 선물(은혜)이다. 이와 같이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그가 교회를 핍박했던 전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은혜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존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불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은혜가 비상응적으로 베풀어진다는 바울의 주장은 기존에 있던 사회 질서를 파괴할만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기존 질서의 주장과 다르게,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바울 살았던 사회에서 선물은 그것을 받을만한 가치 있는 대상에게만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만약 선물의 수준과 상응하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이 베풀어진다면 수여자의 선의가 평가절하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바울이 주장하는 비상응적 은혜가 기존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인 이유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신자들이 소유했던 민족적, 사회적, 개인적 특성들이 무엇이었든 상관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이야기한다(847p). 바클레이는 이것을 무제약적 선물이라고 정의한다. 

 

책을 꿰뚫는 두 가지 키워드

천 페이지가 넘는 바클레이의 책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살펴보았던 두 가지 키워드를 기억해야 한다. 두 가지란, 조건적 선물과 무제약적 선물을 가리킨다. 이 두 개념은 <바울과 선물>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가진 기존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주어진다. 즉, 그것은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가치들과 상관없이 베풀어진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깊이 다루고 있다. 그러나 무제약적(비상응적)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답례할 의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은 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삶의 형태가 사회적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는 무제약적이지만 무조건적이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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